" 신비롭게(秘) 감춰진(隱) 땅" 은비령
'별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여자가 별처럼 다시 오겠다고 했단다. 그것도 2천5백만 년 후에 다시. 은비령의 시작은 이처럼 판타지적이고 아득하다 못해 쓸쓸하다.
엔야가 등장하면서 이 소설의 분위기는 완전히 신비의 세계로 빠져든다. 엔야처럼 말이다.
신비한 목소리로 유명한 엔야는 신사이저를 활용한 특유의 스켓과 영롱한 이미지의 사운드로 앰비언트적인 느낌까지 준다.
그야말로 판다지적인 감상에 젖기에 딱인 음악이다. 물론 은비령의 행간에서 쉬지 않고 뿜어내는 신비로움이 엔야 탓은 아니다.
저자가 능숙하게 퉁기는 이야기의 결들 속에 아름답고 신비한 음악이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고 작가는 그것을 엔야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차용해서
더욱 강열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신비감 때문일까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좀처럼 판타지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자기의 내면에 저 먼 우주를 떠도는 별같이 멀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소설 속의 남자는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친구의 아내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사실 여자는 2천5백만 년 전에 비켜간 자신의 운명이다.
그래서인지 남자는 바람꽃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곤 한다. 바람꽃은 다름 아닌 2천5백 년 동안 남자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던 운명의 이미지이다.
그렇게 긴 세월에도 결코 잊혀질 수 없었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들마다 하나씩 품고 살아가는 시원의 무늬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처럼 건조하게 살다보면 결국 부정하기 마련인 이 시원의 무늬를 작가는 남자와 여자의 운명적 만남의 과정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고, 멀리 두기엔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린 남자와 여자 사이에 소금 짐이 있었다.
친구의 아내라는 점이 그랬고 남편의 친구라는 점이 그랬다. 그래서 두 사람은 멀어질 듯 가까워지고, 가까워질 듯 멀어졌다.
아무런 문제가 될 것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 사이가 이토록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가 상실한 양심일지 모른다.
법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결코 비난 받을 일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는 소금 짐의 무게를 쉽게 벗을 수가 없다.
남자가 친구 생전에 함께 이름 지은 은비팔경 -
제1경 화전 마을에서 마주바라보이는<삼주가병풍>,
제2경 겨울 은비령의 눈 내리는 풍경으로 은비은비(隱秘銀飛),
제3경 마을 서쪽 한석산에 지는 저녁노을로 한석자운(寒石紫雲),
제4경 맑은 날 아침에도 구름처럼 걸쳐져 있는 우풍재의 안개(風嶺霧陣),
제5경 가리봉을 주봉으로 한 가리산의 가을 단풍(佳里秋丹),
제6경 필례골의 흰 돌 틈 사이로 작은 폭포처럼 가파르게 흐르는 여울(筆洞玉川),
제7경 장작으로 밥을 지을 때 안개처럼 낮게 피어올라 바깥마당을 매콤하게 감싸는 우리 공부집의 저녁연기로 은자당취연(隱者堂炊煙),
제8경 맨눈으로도 밤하늘의 은하수를 볼 수 있는 은궁성라(銀宮星羅). 이 있는 곳 은비령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그러나 사실은 2천5백만 년 전의 바로 그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에 해후하게 된다. 운명은 언제나 우연을 가장하여 다가오는 것인가.
남자와 여자는 단 하룻밤만 허락된 은궁성라의 아스라한 침실로 들어가지만 뜨거운 포옹 한 번 없다.
도리어 스치는 손길도 부끄럽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별들이 지고 있었을까. 이제 스쳐 지나가야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일까.
여자가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 남자의 품에 안긴다. 흐느껴 우는 울음도 없고 뜨거운 숨소리도 나지 않는 은궁성라의 침실에 은빛머리카락을 바람처럼 날리는 여자가 있고 별가루를 뿌리며 어둠 속을 날아가는 남자가 있다. 그리하여 은라궁성은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어느 새 운명은 밤하늘을 스쳐갔고 다시 2천5백만 년의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 기다림을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비령은 이제 강원도 설악의 자락에 신비를 간직한 땅으로, 남자와 여자가 2억5천만 년 만에 해후하는 땅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우리의 가슴에 은라궁성의 성스러운 전설을 새겨놓았다. 은비령의 남자와 여자는 오래오래 후대 사람들에게 들려주어할 신비이고 잊어서는 안 될 시원의 무늬이다. 멀지 않은 시간, 2천5백만 년 후에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있었음을 기억해내고 은라궁성의 침실을 아스라이 올려다 볼 것이다.---- "책소개 내용중"
"이제 제 손을 잡아주세요. 그리고 2천5백만 년 후 다시 절 처음 봤을 때 그것을 기억해주시고요. 바람꽃 같다고 말할 때...."
바람꽃
가을에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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